Why Not Associate

Why Not Associate가 33년 만에 스튜디오 운영을 중단했다. Why Not Associate는 내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였던 디자이너들이고, 일상의실천을 시작하면서 가장 닮고 싶었던 스튜디오의 형태를 경험했던 곳이다. 초창기 그들의(마거릿 대처 수상의 얼굴 위에 노동당에 투표하라는 문구가 새겨진) 사회참여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포스터 작업부터, 블랙풀 지역의 해안가에 설치된 거대한 스케일의 시민 참여형 설치 작업, 그리고 기업 클라이언트와 함께 진행한 상업 프로젝트들까지, 그들의 행보는 작업을 대하는 태도부터 막연했던 스튜디오의 방향성을 정하는 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.

그들이 아직 학생이었을 때, ‘타이포그래피계의 악동’이라고 불릴 만큼 왜 그렇게 거칠고 대담한 작업을 했느냐는 질문에, 그들은 “왜 안돼? Why not?”라고 반문했고, 그 태도가 곧 스튜디오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. 자신들은 80년대 기존 사회 질서에 저항하는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펑크록의 영향을 받은 세대이고, 그런 태도가 작업에 묻어 나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고 그들은 말했다.

대학원을 졸업 후 운이 좋게도 Why Not Associate에서 인턴을 할 기회를 얻었는데, 첫 출근 날 어느 프로젝트 촬영을 앞두고 종이 모형을 만들고, 바퀴가 달린 의자를 밀면서 화면을 구상해 보는, 그 과정이 여전히 너무 재미있는지 낄낄거리며 장난치는 50대 아저씨 둘의 모습은 너무나 신선했다.

그들은 콘텐츠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, 속이 텅 빈 아무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은 겉모습만 화려한 작업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. 그러나 한편으로는 작업 그 자체가 주는 시각적인 이미지의 쾌감, 본능적으로 좋아 보이는,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‘어떤 것’을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했다. 좋은 작업이라는 건 한 가지 기준으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, 그들과의 시간을 통해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.

나는 33년 동안 함께 작업한 그들이 어떤 길을 가기 위해 스튜디오 운영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는지는 잘 모르지만, 이제는 삶의 끝을 준비하며 새롭고 개인적인 어떤 것을 해보고 싶다는, 그들의 마지막 인터뷰를 보고 있자니 또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. 처음 작업실을 시작할 때와 같은 ’안될게 뭐 있어?’라는 말을 조금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뱉으며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을 그들의 모습이 상상된다.

Why Not Associate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인 앤디 알트만은 디자인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는 멋진 디자인들이 결코 우리 삶에는 현실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며, 일상에서 구현될 수 있는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고 말했다. 그의 책상 한편에는 세탁 세제를 모아두는 선반이 있었는데, 가장 일상적인 소모품인 디자인의 시대에 따른 변화가 당시 그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했다. 그의 그런 관심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,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를 위한 작업 (혹은 어떤 무엇인가)을 그가 보여줄지를,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이자, 삶이라는 길고도 짧은 여행의 후배로서 기다리게 된다.

아버지와 할머니 잡문

할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이 지났다.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간다고 습관처럼 하던 말이 새삼 실감이 난다. 재수할 때 1년 동안 할머니 집에서 살았다. 처음으로 겪어본 공식적인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뒤척이며 잠 못 들던 그 시절에, 새벽잠에서 깨어보면 항상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날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. 낮게 읊조리듯 이어가시던 그 기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마음이 평온해져서 나는 할머니가 기도를 마치고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나가실 때까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. 그 기도 덕분에 무너지지 않고 잘 견딜 수 있었다고 막내 손자 다운 모습으로 할머니를 꼭 안아드렸으면 좋았을 텐데, 어른도 아이도 아니던 어색하고 숫기없던 그 시절의 나는 도망치듯 할머니 집을 나와 고시원으로 갔다. 그때 내 나이와 같은 20살의 아버지가 할머니를 안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는 나를 어떤 손자로 기억하고 계실까 궁금해진다. 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통화가 마지막이 될 줄 알았다면, 할머니 기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, 능청스럽게 말하며 할머니를 안아드릴 수 있는 좀 더 살가운 손자였다면 좋았을 텐데. 천국에서 평온하시기를 기도한다.      

*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할머니가 가장 기뻐하시던 모습을 본 건, 나일론 신자 같기만 하던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교회 장로가 되신 날이었다. 아직은 장난기 가득한, 지금의 나보다 많이 어린 아버지와 아마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또래였을 사진 속의 할머니.


Best Part Of Me 잡문


SsingSsing: NPR Music Tiny Desk Concert 잡문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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